태그 : 클림트

클림트

약3만년전 출산과 풍요를 기원하여 만들어진 조그마한 여인 조각상 빌렌도르프의 비너스가 오스트리아에서 발견될 당시 1909년, 오스트리아 빈의 한 화실에서는 여성에 대한 또 다른 표현의 시도가 있었다. 구스타프 크림트! 여성의 관능을 남성의 관음적 시선으로 표현한 그는 3만년전의 빌렌도르프의 비너스에 담겨져 내려온 여성의 소재적 여성다움을 완전히 무시하고 자신만의 독특한 표현양식으로 여성을 당당하게 주제화 하였다.

그는 그림을 그리거나 작품을 만든다기 보다는 화폭안에 자신의 연인을 넣어놓는 작업을 하고 자신만을 위한 관음의 대상으로 만드는 유희적 작업을 즐겼으며 다른 이 에게 자신의 그림속 연인을 공개하기를 꺼려했다. 그의 대표작 중 하나인 <유디트> 연작을 보면 왜 하필 많은 여성중에 적장의 목을 베어 손에 들고있는 이스라엘의 여걸 유디트를 관능적 표현의 대상으로 삼았을까? 하는 의문을 던지게 한다.

그는 여성에 대하여 두가지를 말하고 싶었다. 첫째는 19세기 고전주의까지의 수많은 표현양식의 변화가 진행되는 동안 여성에 대한 형식적 표현을 강요해온 아카데미즘에 대하여 철저한 거부를 통해 틀안에 있는 여성을 해방시키고 그 해방의 실제적 표현은 여성 스스로를 성의 주체로 드러내는 것이었다. 둘째 유디트와 같은 남성중심적 지배구조를 극복한 인물을 이야기 중심으로 끌어 옴으로 여성의 정체성을 보다 구체화 하고자 한것이다 후에 이는 패미니즘 미술과의 연결고리를 만들고 있다. 그동안 여성을 표현한 작가는 대부분 남성이었으며 그들은 약속이라도 한듯 남성중심적 공통코드인 성스러움을 여성에게 부여해왔다. 크림트 역시 남성이었으나 이러한 형식적이고 권위적인 지배에서 벗어나 모든 화려한 장식과 감각적 표현을 추구하는 분리파(Sezession)의 리더가 되었다. 어쩌면 그는 그옛날 여성작가 아르테미시아 젠틸레스키가 그린 <유디트>를 남성적 시각에서 재창조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그의 <유디트>연작에 나타나는 주인공의 눈빛을 보고있노라면 젠틸레스키가 표현한 위험적 상황 또는 긴장감의 배치를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가 없다. 방금 적장의 목을 벤 여인의 눈빛이라고 보기에는 너무나 관능적이고, 요염하며 퇴폐적 시선으로, 지켜보는 이를 조용히 압도하고 있다. 적장의 목 그것은 바로 남성중심의 왜곡된 여성관 이었으며 그는 유디트를 통해 그 억압을 베어버린 것이었다.

또하나의 대표작 <키스>. 우리 주변에서 많이 보게되는 대중적 그림 중에 하나이다. 그림을 감상하는 여러가지 방법중에서 작품 <키스>는 우선 구도적관점에서 많은 이야기 거리가 있다. 우선 작품전체에서 원근적 표현이 없는 마치 모자이크된 것과 같은 3개의 오브제가 블록과 같이 맞추어져 있고 가운데있는 뜨거운 포옹과 키스의 두남녀는 배경의 힘을받아 더욱더 돋보이고 있다. 남성의 의상에 있는 사각형의 단순한 패턴은 전체 남성의 네모난모습과 비례적으로 조각나있고 이는 힘과 정열을 표현하고 있으며 반대로 동그란 패턴과 화려한 일본풍 여성의상과 신체의 곡선은 남성의 단순한 네모와 대조되어 더욱더 여성의 고유미를 드러내고 있다. 두 대립의 조화, 여성을 품에안은 남성 남성의 품에 안긴 여성, 네모품에 안긴 동그라미. 네모안에 들어간 동그라미 어떠한 작품도 이렇게 분명하게 대립되는 객체이면서 서로의 자연적인 역할과 본능을 조화롭게 표현한 작품은 없을것이다.
여성을 멀찌감치 세워놓고 그렸던 수많은 그림들에서 느껴지는 여성성의 관조적표현이 이작품에서는 찾아볼 수가 없다. 남성의 근원적 본능과 동일하게 여성의 본능을 그대로 진솔하게 표현한 작품 <키스>, 그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새로운 시도가 아닐 수 없었다.



1862년 7월 14일, 오스트리아 빈 근교 바움가르텐에서 태어났음.
35세가 되던 해엔 젊은 예술가들과 함께 비엔나의 보수파에 항거하는 분리파의 공동창설자가 됨. 신예술운동에 영향을 받은 분리파 그림의 특징은 장식적이고 이국적이며 관능적이었고 특히 그의 그림은 그 시대의 대표적인 화가임에도 불구하고 사회적으로 물의를 일으켜 많은 비판을 받음. 1894년 오스트리아 정부의 요청으로 그린 그림 「철학」, 「의학」, 「법학」을 완성하였을 때 대학 강당 장식화가 사람들로부터 거센 비난을 받고 이해받지 못하였음. 1900년 발표한 이 그림들에서의 나체는 사람들에게 충격을 주었고 클림트는 제도권의 복고주의에 부딪치게 됨.
국내에서 대중의 많은 비판을 받았던 그는 국외에서 더 많은 전시회를 통해 유명해 졌으나 사생활이 늘 복잡하고 비밀스러웠음.
대중에게 모습을 들어내는 것을 매우 싫어했던 그는 모든 인터뷰를 거절했고 자신의 초상화를 그리지 않았음.
1918년 클림트는 뇌일혈로 쓰려진뒤 반신불수가 되었고 유행성 폐렴으로 인하여 병세는 더욱 악화되어 2월 6일 쉰 여섯의 나이로 사망함.

글 : 송근호 (중앙대학교 예술대학원)

by 유진 | 2009/02/26 11:56 | Snowfall in April | 트랙백 | 덧글(0)

◀ 이전 페이지다음 페이지 ▶